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랑한 화가, 전혁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랑한 화가, 전혁림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24>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랑한 화가, 전혁림

전화백(全畵伯)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夫人)께서는
위벽(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 김춘수, <전혁림 화백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주문한 ‘한려수도’

노무현 대통령 재직 시절인 2006년, 청와대 벽면에 그림 한 점이 새로 걸렸다. 통영 앞바다를 그린 <한려수도>란 대작이다. 작가는 당시 나이 구십이 넘은 노 화백이었다. 화백이 젊은 시절 그린 그림이 아니라 구십 노구에 그린 신작. 그 그림의 작가가 전혁림(1915~2010) 화백이다. 코발트블루(Cobalt blue)! <한려수도>의 바다는 더없이 푸르고,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다. 화면에는 없지만 푸른 물빛으로 보아 분명 하늘도 푸르렀을 것이다!

2005년 11월 어느 날, 용인의 이영 미술관에서는 전혁림 화백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2005.11.12~2006.01.18)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YTN 뉴스에서는 전시 소식이 나갔다. 아침 방송을 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가자” 하고는 버스를 타고 미술관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전시회를 관람하고 전시된 전 화백의 작품 <한려수도>의 구매를 원했다. <한려수도>란 작품은 이영 미술관에서 전 화백의 기획전을 준비하며 전 화백에게 제목을 정해주고 의뢰해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당시 이영 미술관에는 전 화백의 추상화만 있었지 풍경화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통영 풍경을 대작으로 그려달라고 청했고 노 화백은 구상과 추상을 섞어 동화 같은 구성으로 2000호짜리 대작을 그렸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작품에 감동을 받고 작품 구매를 원했으나 사이즈가 너무 커 청와대에는 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그림을 다시 그려줄 것을 청했고 전 화백은 응낙했다. 전 화백의 <한려수도>가 청와대 벽에 걸리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전 화백의 아들 전영근 화백이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부터 전 화백의 그림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전 화백의 그림을 수집하던 친구의 집에서 그림을 많이 접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돌아가신 줄 알았던 전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듣자 반가움에 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해서 청와대에 소장 중인 전혁림 화백의 <한려수도> ⓒ전혁림 미술관 제공


해석에 반대한다!

색채의 마술사, 다도해의 물빛 화가, 색면추상의 대가, 한국적 추상화의 비조, 한국의 피카소. 모두 전혁림 화백을 일컫는 다양한 수식어들이다. 전혁림 화백은 이승을 뜨고 없지만, 통영에는 그의 작품이 상설전시 되는 미술관이 있다. 전혁림 미술관. 미술관은 통영 미륵산 아래 봉수골에 있다. 전혁림 미술관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기분이 환해진다. 미술관이 아니라 어디 바다나 들에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건물을 보고 있으면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미술관 건물을 감싸고 있는 색채의 향연 때문이다.

미술관 건물은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건물의 외벽은 그대로 전시실이다. 건물에는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들이 7500장이나 전시되어 있다. 세라믹 타일에 두 화가의 작품을 담아 외벽에 붙인 것이다. 3층의 외벽은 전혁림 화백의 1992년 작, 창(Window)을 타일 조합으로 재구성해 대형 벽화를 만들었다. 미술관 건물의 안과 밖이 모두 전시장이니 미술관은 휴관 일에도 전시가 계속되는 셈이다!

미술관이 개관한 것은 전혁림 화백 생전인 2003년 5월 11일이다. 1975년부터 30여 년 살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등대와 탑의 형식을 접목해서 미술관을 건립했다. 등대는 전 화백이 즐겨 그리던 통영 바다를 상징하고 탑은 전 화백이 영감을 얻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미술관 전시실에서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 80점과 관련 자료 50여 점이 상설전시되고 작품들은 3개월 단위로 교체 전시된다.

▲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인 전혁림 미술관 외벽. ⓒ강제윤 제공

나는 그림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추상화에는 문외한이다. 구상화는 눈으로 형태가 느껴지는 그림인데 추상화는 눈으로 형태가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라는 정도로만 추상화를 알고 있다. 어째서 추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전혁림 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전영근 화백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명료하다.

“추상화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많은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더 많은 그림을 보세요. 그러면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참, 그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이지!”

전 관장의 이야기에 나는 무릎을 쳤다. 추상화가 어렵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그림을 해석해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와 해석이 필요한 예술 작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이해와 해석에 앞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이는 내가 늘 시를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라! 그렇다. 해석은 예술의 적이다! 일찍이 수전 손택이 갈파한 것처럼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 그래서 해석에 반대한다!

“오늘날은 그런 시기, 대부분의 해석 작업이 반동행위에다 숨통을 조이고만 그런 시기다. 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정력과 감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지식인의 존재가 이미 해묵은 딜레마가 되어버린 문화권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 전혁림미술관에 전시중인 접시에 그린 전혁림 화백의 산수도. ⓒ강제윤 제공


예술에는 선생이 필요 없다!

전혁림 화백은 통영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화업을 성취해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활동했었지만 생애 대부분은 고향 통영에서 작업을 했고 통영에서 생애를 마쳤다. 전 화백은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에서 예술가에게는 스승이 필요 없다고 단언한다.

“예술은 선생이 필요 없어. 자기 혼자 배우는 거라고. 나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나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어. 스승이 있다면 책하고 자연이지.”

나 또한 시를 누구에게 배운 적 없이 시인이 됐다. 스승이 있다면 책과 사회였다. 그래서 나는 전 화백의 예술관에 동의한다. 전 화백은 아흔이 넘어서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붓을 들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화가였다. 전혁림 화백에 대한 이 짧은 글을 쓰기 위해 나는 틈만 나면 미술관에 가서 그의 그림을 감상하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전 화백에 대한 책들을 섭렵했다. 공부한 만큼 눈이 조금씩 뜨이는 것 같다. 그래도 나의 전혁림 공부는 여전히 부족하다. 내가 만났던 책 중에 전 화백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그의 구술집이었다. 국립예술자료원에서 기획한 예술사 구술 총서 두 번째 책 <전혁림 : 다도해의 물빛 화가>(수류산방 펴냄). 거기 가슴을 때리는 전 화백의 말씀들이 많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희랍의 바다나 통영의 바다나 다 같잖아. 내가 희랍에 갔을 때 바다를 보고 이 바닷물이 통영항의 바닷물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

구술 당시 96세였던 노 화백은 자신이 바다를 그리는 이유가 바다에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한 세기를 산 로맨티스트 노인이라니! 화백은 그리스 여행을 갔을 때 그리스의 바다와 통영의 바다가 같은 바다, 똑같은 바닷물이라고 느끼셨단다. 이국 취향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리스 같은 이방의 바다는 낭만적이라 여기면서 한국의 바다는 그저 범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혁림 화백은 한국의 바다에도 그리스 바다와 다르지 않은 낭만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전혁림 화백의 그림 속 통영 바다는 끝 간데없이 푸르고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또 한없이 낭만적이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로맨스를 꿈꾸게 한다. 전 화백은 한국 바다가 가진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강렬한 푸른 색채로 표출한다. 통영의 바다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늘 짙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 화백은 통영의 바다가 푸르름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 그 푸른 바다를 얼른 포획해 화폭으로 옮겨버린다. 절정의 바다를 통째로 훔쳐다 화폭에 담아버린 것이다. 이건 마치 진묵대사의 게송처럼 “하늘을 이불 삼고 바다를 잔을 삼아” 놀던 그 경지가 아니겠는가.

▲ 전혁림 작 <만화로부터> ⓒ전혁림 미술관 제공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한 존재”

전혁림 화백은 일찍부터 그림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으나 오랜 세월 잊힌 작가로 살아야 했다. 1949년 1회 국전에서는 대통령상을 놓고 수상자와 겨루다 입선했고, 1953년 2회 국전에는 <늪>이란 작품을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다양한 단체전과 개인전에 참가했고 <국전>에도 꾸준히 출품해서 입선했지만 중앙화단과 교류를 끊고 지낸 탓에 비교적 오랜 세월 무명에 가까운 ‘지방 작가’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말년의 구술에서 전 화백은 서울중심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잊지 않는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낫지만 그전에는 서울 놈들이 얼매나 텃새가 심했는지 몰라요. 한국은 시골에 있으면 전부 다 지방 작가라 하는데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는 기고. 지금 서울도 하루만에 왔다갔다하는데 지방이 있나? 전부 대한민국이지, 서울이지. 멸시, 멸시, 멸시 많이 당했어요. 문화예술을 기획한다든지 무슨 행사가 있다든지 그러면 서울 사람들끼리 즈그만 해가 패거리 문화 패거리 문화 하는가 보던데. 지금도 그라는 갑데. 그거는 아주 안 좋은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도 시골이오.”
– <전혁림 : 다도해의 물빛 화가>

‘멸시를 당하던 지방 작가’ 전혁림이 한국 화단의 중심으로 불쑥 솟아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79년 <계간 미술>이 기획한 <작가를 재평가한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는 환갑이 한참 지난 전 화백이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한 신호탄이었다. 전 화백은 백남준, 오지호 화백 등과 함께 과소평가 받는 작가로 재조명됐다. 당시 기사에서 석도륜은 “잊혀져 있어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전혁림. 전혁림이란 작가야말로 방금 인구마다 회자되고 있는 그 누구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작가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그는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썼다. 반면 이중섭, 김은호 화백 등은 과대평가 받는 작가로 재평가됐다.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에서 질문자가 “석도륜은 이중섭 선생은 그림보다 신변잡기 얘기로만 평가됐던 사람인데 선생님은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 화백은 “이중섭은 사건이 많은 사람이지만 정당하게 평가된 사람이었다”고 옹호했다. 전혁림 화백과 이중섭 화백의 인연은 깊다. 이중섭 화백의 부산 피난 시절 처음 만났고 이후 이중섭 화백이 통영에 살던 2년 동안 내내 술도 마시고 그림도 그리며 함께 어울렸다. 1952년에는 통영의 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이중섭, 유강렬, 장윤성이 함께 어울려 4인전을 열기도 했었다.

▲ 전혁림 작 <새만다라> ⓒ전혁림 미술관 제공


구십, 아직은 젊다!

전혁림 화백은 <계간미술>의 재평가를 계기로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재조명 되며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지속해서 열었고 왕성한 창작을 이어갔다. 그래서 전 화백은 “조선 민화에서 느껴지는 조형적 미감과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대비로 단청이나 전통보자기 옛 장신구 등에서 느껴지는 민족 고유의 정서를 재해석하고 현대화한 한국적 색면 추상화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평가처럼 전혁림 화백은 흔히 한국 추상화의 대가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추상과 구상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경계인 반추상에도 있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경계가 없는 자유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구상과 추상, 반추상 같은 경계를 두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면 어떤 기법이든 형식이든 재료든 가르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 그러므로 전 화백의 작품을 구상이나 추상, 반추상 따위로 구분하여 묶어두려는 시도는 부질없어 보인다. 삶은 추상과 구상 혹은 반추상 어느 한 요소로만 구성될 정도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온갖 요소들이 혼융(混融)되어 있다. 예술은 그러한 삶의 반영이 아닌가.

전혁림 화백의 그림은 서양화지만 민화와 공예품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9년, 중앙일보 주최로 전혁림 근작전 ‘칠순의 젊음, 다도해의 물빛 화가’ 전이 열렸을 때 전 화백은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 그림은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서 걸러내진 내 삶의 총체다.”

전 화백은 전통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민족적인 것을 현대화하고 전혁림화했고 고령이 된 뒤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전영근 관장은 아버지 전혁림 화백이 작고할 때까지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어떤 이들은 그림 많이만 그리면 뭐하느냐, 좋은 그림 하나만 그리면 되지 한다. 하지만 만개를 그려야 그중에 하나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대가라 해서 그리는 것마다 명작이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천재 화가들도 하루에 열점 이상씩 그렸다. 정열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그림을 그리셨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까닭일까. 전혁림 화백이 구십이 넘어서 내놓은 작품들에서도 정열이 넘친다. 원로의 작품이 아니라 청년의 작품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그의 전시회 제목처럼 ‘구십 아직은 젊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술가들뿐이랴. 조로해 버리는 이 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경구다. “구십, 아직은 젊다!”

2017-10-13T14:51:06+00:00